“밥은 먹고 산다”는 말 한마디로 시작한 43년, 목공예가 정규용
작성자최고관리자
등록일2026-01-27
조회수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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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용은 1983년, 미대 진학을 준비하다 우연히 한 목조각가의 공방에 들어섰다. “대학 갈 필요 없다. 그냥 이 길로 가라. 밥은 먹고 산다”는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로부터 40년.
그는 목조각, 서각, 아트 퍼니처, 비스포크 가구에 이르기까지, 한국 목공예 산업의 성쇠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제작자이자 작가로 살아남았다.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생계 가능한 길을 찾는 과정에서 그가 도달한 지점 중 하나가 지금의 원목 테이블 맞춤제작소 한솔목공이다.
이 인터뷰는 한 장인의 성공담이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기술과 꿈, 생계를 조율하며 끝까지 이 길 위에 남아 있었는지를 기록한 이야기다.
글 | 인테리어 전문기자 장영남 jekyll13@naver.com
Q1. 1983년에 미대 진학을 준비하다가 목조각가(Wood Sculptor)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A1. 그때가 83년도였어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미대 입시를 준비하려고 조각하는 곳을 찾아갔어요. 어릴 때부터 조각 쪽으로 재주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미대 진학에 이런 손재주가 도움이 될까요”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안 될 거라고 하면서 대신 여기서 일해보라며 잡일을 시키더라고요. 한 달이 지날 때쯤, “손재주가 있어 보이니까 대학에 갈 필요 없이, 그냥 이 길로 나가라. 밥은 먹고 산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큰 화두였어요. 그래서 거기 눌러앉았죠. 군대 가기 전까지 1년 반 정도 그렇게 있었고요. 군대 가서도 계속 나무 생각만 했어요. 휴가 나오면 공방에 들러 조각칼도 직접 만들고 재료도 사두고요. 제대하자마자 다시 이 길로 돌아왔죠.
목조각가로 출발해 아트 퍼니처와 비스포크 가구까지 작업 영역을 확장해 온 40년 장인의 현재 모습.
Q2. 1980년대에는 독수리나 부엉이 같은 대형 목조각품이 ‘부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고요. 그때 시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A2. 그때는 진짜 호황기였죠. 그때 월급이 한 달에 3만 8천 원~4만 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보조로 참여해 만든 테이블이 450만 원에 팔리는 걸 봤어요. 일본 수출도 많았고요.
나무는 주로 마디카를 썼어요. 인도네시아에서 들어오는 연질목인데, 조각하기 쉬우면서도 뒤틀림이 적었어요. 국내산으로는 피나무를 썼는데, 그건 훨씬 더 예쁘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때는 조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조각은 조형 감각과 그걸 형태로 구현해낼 섬세한 손기술이 타고나야 돼요. 그러다 보니까 인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임금도 일반 가구 쪽보다 두세 배쯤 높았어요. 외출복 차림으로 작업하고 그대로 탈탈 털고 일어나 퇴근할 정도로 깔끔한 일이어서 남들 눈에도 ‘예술가’처럼 보이던 시절이었죠.
가전 배치를 재현했다.
Q3. 구상 목조각에서 서각으로, 아트 퍼니처, 그리고 비스포크 가구로 분야를 넓혀 오셨습니다. 영역 확장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으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는지요.
A3. 어떤 산업이든 흥망의 사이클이 있잖아요. 잘된다 싶으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정점에 오르면 다시 기울기 마련이죠. 국내 목조각은 1990년대 중반부터 내리막을 탔어요. 지금은 주요 생산지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옮겨졌고요.
저는 목조각뿐 아니라 서각과 가구 제작도 동시에 배웠거든요. 서각은 유명 서예가들의 작품을 받아서 목재에 새겨 판매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그게 발전해서 2000년도부터는 부산 지역의 문화재 현판 작업을 많이 맡았어요. 소헌 정도준 선생과 초정 권창륜, 구당 여원구 선생 같은 당대 서예 거장들의 필체를 7년간 자연 건조한 금강송에 새겨 넣는 정밀한 작업도 했고요.
공모전에도 오래 출품했어요. 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학벌도 없으니, 사회적 인지도를 얻으려면 공모전밖에 길이 없었거든요. 작품을 출품해 입상하면 점수가 누적되고, 그 점수가 일정 기준을 넘으면 협회 초대작가 자격이 주어져요. 그렇게 점수를 쌓아 초대작가 타이틀을 얻었어요. 그런 역량으로 동아대 같은 곳의 학생들 졸업 작품을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돈이 정말 없는 거예요. 작품 활동 자체는 미칠 정도로 재밌는데, 계속 출품작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감이 컸어요. 개인전을 해야 작가로 인정받고 작품이 팔려야 돈이 되는데, 전시를 여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요. 그래서 우드슬랩으로 확 갈아탄 거예요.
망할 위기도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끈기, 고래 심줄 같은 끈기로 버텨왔어요. 한 번 꺾이면 그대로 무너지더라고요. “남들이 생각 못 할 정도로 지독하게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때는, 이상하게도 길이 만들어져요. 생계가 완전히 확보되지는 않아도, 어떻게든 이어지더라고요.

주련과 현판의 재료로는 울진·봉화 지역의 금강송을 어렵게 구해 사용했다.
Q4. 다행히 우드슬랩 테이블은 시대의 흐름과 맞물리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당시 우드슬랩 인기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A4. 처음에는 우드슬랩이라는 명칭도 없었어요. 저는 그걸 ‘절제된 자연주의’라는 표현을 써서 만들었어요. 카페풍 인테리어가 유행하면서 통원목 테이블 수요도 빠르게 늘었고, 자연스럽게 그 시장에 올라탄 셈이죠. 너무 바빠서 거의 2~3년 동안은 날짜도 모르고 요일도 모르고 살았어요. 오후 4~5시에 점심을 먹고 밤늦게까지 일했어요. 그런데 딱 코로나 전까지만 그랬어요.
우리가 보통 한 아이템의 시장 수명을 15년 정도 전망해요. 소득 수준 3만 불을 넘어서면, 우리나라에서도 우드슬랩 수요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우드슬랩 인기가 2~30년 정도 이어졌는데, 우리나라는 워낙 변화가 빠르니까 15년은 갈 것이라고 예상했죠. 그런데 한창 전성기일 때 코로나가 터져버린 거예요. 더 결정적인 건, 코로나 끝나고 나니까 경기가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Q5. 너도나도 우드슬랩 시장에 뛰어든 것도 시장이 빠르게 식은 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작가님께서 만든 우드슬랩은 일반 가구회사에서 만든 것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었는지요.
A5. ‘선(Line)’이에요. 제가 만든 우드슬랩은 ‘선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목조각을 하면서 터득한 조형감과 물성 해석력, 공간감 같은 것들이 우드슬랩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나무를 깎아 형태를 만들어가는 조각의 원리는 모든 목공예를 관통해요. 조각이란 모든 조형 예술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에 서각이든 가구든, 오브제든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뼈대가 돼요. 그런데 이런 조각가의 관점은 일반 가구회사의 우드슬랩에서는 잘 나오지 않아요.
그다음에 제 공장에는 완성품이 하나도 없어요. 우드슬랩들은 1차 가공 상태로 전시해 둡니다. 손님이 선택하면 그때 다시 가공해서 맞춤 제작으로 배송하는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어요. 보통 업체들은 건조 직후 바로 대패작업을 하고 오일마감해서 납품하지만, 저는 건조실에서 나온 원목을 일정 기간 자연 상태로 둬요. 온습도 변화에 따른 나무의 추가적인 변형을 일부러 한 번 더 겪게 하는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 온습도 변화가 잦은 아파트 환경에서도 원목이 변형되지 않고 버티거든요.
고객이 선택하면 그때 다시 가공해 맞춤 제작으로 완성한다.
Q6. 40년 넘게 나무를 다루신 작가님은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를 것 같습니다.
A6. 저희처럼 나무를 만지는 사람들은 수종에 우열을 두지 않아요. 나무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는 “느티나무는 비싸니까 좋은 거고, 소나무는 싸니까 나쁜 거다”같은 식으로, 나무를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하도록 배웠어요. 그런데 목공예인으로 살다 보니까 그런 기준이 무의미하더라고요. 이 나무는 이래서 좋고 저 나무는 저래서 좋은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나무의 특성을 파악하고 용도에 맞게 쓰는 안목을 갖추는 일이에요.
저는 나무를 대할 때, ‘이 나무가 어떻게 자랐는지’를 먼저 봐요. 생장 환경이 어땠는지, 그래서 옹이와 결의 흐름이 어떠하며 전체적인 모양은 어떻게 잡혔는지를 자세히 관찰해요. 나무가 자라고 변해가는 모든 과정을 어릴 적부터 지켜봤기 때문에, 나무를 보면 어떤 방식으로 다뤄야 좋을지 감이 바로 와요. 반면 현대적인 기계 시설에만 의존하면, 재료의 속까지 읽어내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Q7. 평생을 나무와 함께하면서 스스로 지키는 원칙이나 직업 정신이 있다면요.
A7. 각자 전문 분야가 있어요. 전 그걸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옻칠 같은 경우, 저도 배워서 할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제 작업 외에는 맡지 않아요. 그것만 평생 해온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가 있어요.
그리고 남이 만든 가구는 절대 손대지 않아요. 보수하거나 형태를 바꾸는 것도 하지 않아요. 그건 그 사람의 작품이거든요. 제가 손대는 순간 그건 더 이상 그 사람 작품이 아니에요. 의뢰가 들어와도 “그거 만든 사람한테 가세요”라고 말해요.
그게 그 장인에 대한 예의이고, 동시에 제 작품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나무를 대할 때도 예의가 필요하듯, 같은 길을 걷는 동료 장인에게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봐요.

나무 상태가 좋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규용 작가.
그렇게 43년째, 오늘도 그는 같은 하루를 산다.
Q8. 43년 나무 인생,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8. 지금도 작업을 마치는 시간이 저녁 11시, 12시예요. 만약 이 일을 재미가 아닌 노동으로 여겼다면 지금까지 못 살아남아 있을 거예요. 시간이 나면 나무를 끄집어내서 “이걸로 뭘 만들어볼까”, “이걸 어떻게 만들어볼까” 하고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구상하다 다시 제자리에 넣어둡니다. 그 정도로 너무 재미가 있어요.
나무와 저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애정과 애증의 관계, 그리고 동반자 같은 관계예요. 맨날 얻어맞고 살거든요. 갈비뼈도 몇 번 부러졌고, 새끼발가락이 찍혀서 뼈가 부서진 적도 있고요. 지금도 무릎 밑으로는 멍 자국이 엄청나게 많아요. 나무한테 엄청 얻어맞으면서 삽니다. 그런데도 나무가 그냥 좋아요.
Q9. 만약 20대로 돌아가도, 다시 이 길을 선택하실지 궁금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유도 말씀해 주세요.
A9. 제가 볼 때 나무 쪽에 30년 이상 종사한 분들은 사실 나무에 미친 사람들이에요. 다시 태어난다 해도 본능적으로 그 길을 갈 거예요. 이게 중독이에요. 피곤하고 졸려도 나무를 보면 잠이 깨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거든요. 이게 어찌 보면 정상은 아니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저에게 300년이 주어져도 만들고 싶은 걸 다 못 만들 것 같아요. 머릿속에 있는 것 중 2~3%도 만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늘 있어요. 이름을 날리려면 완전히 창작 활동에만 매진해야 하는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발을 묶죠. 만약에 처자식이 없다면, 10년이고 20년이고 처박혀서 작가주의로 살았을 거예요. 제가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몇십 년 작품에만 몰입하면 그 나름의 색은 나올 거라고 봐요.
지금도 우드슬랩을 하면서도 슬슬 옛날에 했던 가구나 나만의 가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창작 본능 꿈틀대고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시중에 없는 창작에 이끌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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