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공부

어느 목재 학자가 들려주는 생활 속 목재 이야기.

불심(佛心)이 빚어낸 이름, 사리(舍利)나무에서 싸리나무까지

Date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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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와 싸리나무 전설의 기원을 찾아서

오래된 사찰이나 고건축물을 답사하다 보면, "이 기둥은 천 년 된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흥미로운 전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특히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수덕사 대웅전 기둥이나  4천 명 분의 밥을 담았다는 순천 송광사의 '비사리구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식물학적으로 싸리나무는 관목에 불과하여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싸리나무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바로 느티나무입니다.

 

왜 느티나무는 싸리나무로 둔갑하게 되었을까요?

 

부석사 무량수전 느티나무 배흘림 기둥

 

수덕사 대웅전, 후면 기둥은 근래에 보수한 기둥이 몇 개 있어, 육안적으로 전형적인 느티나무 형태를 볼 수 있음 

 

1. 언어적 전이: '사리(舍利)나무'의 와전
가장 학술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유는 언어적 변형에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목재의 결이 수려하고 변형이 적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최고급 공예품인 '사리함(舍利函)'을
제작하는 데 주로 쓰였습니다.
사찰에서 사리함을 만드는 귀한 나무라는 뜻에서 '사리나무'라고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발음이 된소리로 변해 '싸리나무'로 정착된 것입니다.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역시 싸리나무 구유란 의미로 '수 백년 묵은 거대한 싸리나무(비사리)로 만든 구시' 라는 전설로 남게 된 것입니다. 실제 수종은 느티나무이지만 이름 때문에 싸리나무 전설이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느티나무 사리함

 

 

비사리구시

 

2. 종교적 영험함과 민간 신앙의 결합
사찰의 전설은 종교적 경외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종종 자연의 이치를 뛰어넘는 서사를 차용합니다.

  • 불가능의 가능화: 손가락 굵기로 자라는 싸리나무가 법당을 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부처님의 영험함을 증명하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 기복 신앙으로의 확장: '싸리 기둥을 안고 돌면 극락에 간다'거나 '아들을 낳는다'는 등의 민담은 이러한 신비주의가 대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과학적 진실: 느티나무(Zelkova serrata)의 가치
현대 목재 해부학의 목재식별(Wood Identification)로 이 유물들의 실제 수종은 느티나무임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고건축(고려말기 이전)에서 가장 사랑받은
목재 중 하나입니다.

  • 뛰어난 물리적 특성: 비중이 적당하고 단단하며, 습기에 강해 잘 썩지 않습니다.
  • 심미성: 목재 특유의 화려한 무늬는 장엄한 법당의 격을 높여줍니다.

 

느티나무 횡단면 입체현미경 사진

 

느티나무 판목

 

느티나무 정목

 

4. 맺음말

비사리구시와 사찰 기둥의 '싸리나무 전설'은 단순한 오해를 넘어, 귀한 목재를 대하는 선조들의 태도와 신앙심이 빚어낸 독특한 문화유산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거대한 나무통
앞에서 느티나무의 강인함과 '사리나무'라 불렸던 그 시절의 경외심을 동시에 읽어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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